지난 연재에 이어 기획자의 진화과정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겠습니다.
3. 질풍노도의 시기
걸음마 단계를 지나게 되면, 주워 들은 것도 많아지고 직간접 경험치가 조금씩 축적됩니다. 하나의 키워드가 주워지게 되면 그걸 기반으로 퍼즐놀이를 할 수 있는 수준이 되는거죠. 이 때의 기획은 그런대로 모양이 잡혀있지만, 디테일이나 실질적인 부분에서 허술한 부분을 많이 노출시키게 됩니다. 말하자면 그림을 그리되, 겉모양만 그럴듯하게 흉내내는 수준이랄까요..

하지만 자신의 일에 대해 만족감이 가장 큰 시기이기도 합니다. 좋게 말하면 자신감, 나쁘게 말하면 자만감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논리를 만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균형감을 잘 잡지 못하면 아집덩어리 기획자가 되어버릴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이 때는 프라이드를 운운할 시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기 프라이드를 내세우는 걸 보곤 하는데 프라이드에 비례한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단 이 시기가 아니더라도 기획자는 항상 새로운 걸 접하는 경우가 많고, 정보터득과 흡수에 가장 적극적이어야 하는 포지션이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비록 아집을 부리더라도 자기반성을 통해 기획자의 소양인 겸손함을 배울 수 있으면 위험한 시기를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겠습니다. 똥고집 꼰대로 살아가고 싶지 않으면 명심..또 명심…
그럼 왜 이 단계를 질풍노도의 시기라 표현했느냐…이 시기는 기획자로서의 자기 주관이 잡히는 과정에서 주위와의 충돌이 유독 많기 때문입니다. 독립적인 영역을 구축하지는 못하였으나, 자신의 생각을 표출할 수는 있는 중간자적 입장이기에 프로젝트에서 사람간의 조정, 자기 기획의 적정선을 지켜가는 능력이 요구됩니다. 그런데 소위 기획자라는 족속들은 나름 머리가 쌩쌩 돌아간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윗사람에게는 인정을, 아랫사람에게는 복종을 원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앞의 두 단계를 착실히 올라왔다면 좀 더 유연하게 지나갈 수 있겠지만, 경험의 부재 또는 생겨먹은거(인간성)가 에라~면 좋은 기획일지라도 욕만 실컷 먹고 불로장생의 꿈을 꾸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기획이라는 것이 결국 사람과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이 시점에서 이미 그 기획은 망한!기획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질풍노도 시기인 청소년기에는 담배도 좀 빨아보고, 술도 몰래 마셔보고, 엉덩이가 바짝 치켜 올라간 오토바이 타고 진상부리고..등등 수많은 진상테크를 타더라도 철들면서 사람되면 괜찮습니다. 인생이라는 마라톤에서 길게 보면 1,2년 삽질이야 경험이고 추억이 될 수 있습니다. 삽질하다가 좀 디어보고 철드는 것도 사는 재미 중 하나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획자의 질풍노도 시기에는 반성의 때가 너무 늦으면 안됩니다. 사람과 일에 정면으로 부딪히되, 되돌아보고 고쳐나가는 작업을 계속해야 합니다. 사람과 일은 기획자의 첫 인상을 오래 기억합니다. 유능무능을 떠나 기획자로서의 기본적인 부분에서 실망을 주게 된다면 이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를 지나 진짜 ‘기획자’가 되어가는데 큰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어지름과 정돈을 반복하는 과정을 잘 갈무리하고 나면, 이제는 제법 안정감이 느껴지는 기획자로 도약하게 됩니다.
4. 디렉터
인정도 받아보고, 된통 깨져도 보면서 ‘기획’이라는 것에 대해 자기 주관을 가지고 움직이는 때입니다. 이제는 주어진 키워드가 아니라 스스로 키워드를 이끌어내고 그것을 전개해 나가는 로드맵을 그려갈 수 있는 단계입니다. 프로젝트 시작에서부터 엑시트까지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그것에 필요한 요소요소(예를 들면 사람, 자원, 시스템 등)를 적절히 배치하고 운용하는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그리고 프로젝트의 방향에 대해 막힘없이 풀어줄 수 있는 여유와 실력을 보여줍니다. 슈퍼맨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 때는 찾는 사람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고, 돌봐줄 사람도 많아서 스케쥴이 숨쉴 틈 없습니다.

다만 특이한 것은 몸은 바쁠지언정 마음은 여유롭다는 점입니다. 더구나 문서작업을 비롯한 일들은 백업해 줄 수 있는 전담 백업맨이나 팀이 붙어주기 때문에 자신이 일을 기획하고 실행하는데 훨씬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백업자원을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대한 노하우도 쌓여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단계를 방송국 일로 치자면 PD에 비유하고 싶은데요. 어떤 단계에서보다 높은 강도의 업무량을 소화하지만 그에 걸맞는 능력이 갖춰지고 권한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획’의 참맛을 알고 비로소 자신의 프로젝트를 사랑할 수 있는 단계입니다.
기획자들이 하는 말로 프로젝트는 자신의 ‘새끼’같다고 합니다. 자신의 생각으로 낳아서 보살피고 기르고 언젠가는 시스템화된 조직으로 전해줘야 하는 것이 이런 표현을 납득케 하네요.

프로젝트의 모든 방향과 단계를 총괄하고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이 단계야말로 ‘기획자’로서 가장 빛나는 시기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5. 강태공
머 역사적으로 강태공은 왕조를 창업하는데 기여한 인물로 대단~대단~대단~하신 양반이죠. 이런 사전적 지식을 배제하고, 느낌상으로만 소제목을 단건 제맘입니다.;; 하여튼 강태공이란 양반이 여든살이 될때까지 낚시만 하다가 기회를 잡았다는데 기획자의 최종 단계의 모습은 이런 느낌하고 비슷합니다.

한량처럼 빈둥대는듯이 보이나 흐름을 읽고 있는거죠. 이 흐름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입에 거품을 물고 전후반 풀타임으로 나불거려도 모자랍니다. 하지만 이걸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없죠. 기획자라기보다는 한 기업의 CEO라던가 조직의 리더가 맞겠네요.
결국 최상위 기획자는 리더의 형태입니다. 다시 얘기로 돌아가서, 흐름을 보는 눈을 기르는데에는 앞의 과정을 충실히 하는 것에 +@가 있어야 합니다. 그만큼 내적인 노력이 없으면 이 ‘흐름’이라는 것을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기획이라 한들 시대의 요구를 읽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리고 그 흐름에 맞추어 최적의 시기에 기획안을 세상에 내놓는 ‘때’를 잡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한가지 틀에서 역시 ‘흐름’입니다.

이 ‘강태공’단계에 들어선 기획자들에게는 여유 이상의 무언가가 있습니다. 주위에서 보면 그냥 ‘한량’입니다. 이들은 큰 흐름을 읽고 실무자에게 틀과 방향만을 건네주는 것으로 그 역할을 다합니다. 그 이상은 관여하지 않는 것이 나름의 불문율이겠군요. 더 들어가면 지켜야 할 영역의 붕괴니까요. 단적인 예로 기업의 CEO가 신입사원의 업무문서에 빨간 색연필로 동그라미 치고 있으면 그 기업은 쫑~났다고 봐야 합니다. 그 시간에 신문 한글자더 보는것이 리더이자 기획자로서 훨씬 바람직할 뿐 아니라, 중간에 있는 실무자들을 하늘로 날려버리는 것이기 때문이죠.
이 단계의 기획자들은 큰 시야를 가지고 전체적인 흐름을 꿰뚫으며, 작은 움직임들을 모아 하나의 흐름으로 묶는 일을 합니다. 팀장 이상급의 기획자가 자기 방에서 멍때리고 있다고 욕하지 마세요. 단순히 멍때리는 것일수도 있지만, 그들에게는 그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강태공의 ‘낚시’가 그러하듯 흐름과 때를 조율하는 일은 시간과 내면적인 치열한 계산이 필요한 일입니다. 이들에게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라는 말이 썩 잘 어울리겠군요.

두 편에 걸쳐 기획자의 진화과정에 대해 주절거려 보았습니다. 어떤 분야든 10년을 정진하면 전문가 칭호를 듣습니다. 하지만 기획자에게는 그런 칭호가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집니다. ‘기획전문가’…아무리 봐도 이상합니다. 기획은 시대를 선도해가야 하기 때문에 스킬이 누적되는 분야가 아닙니다. 또한 최적화된 구조가 없습니다. 현재의 최선이 미래의 최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술은 누적되어 발전하지만 ‘기획’은 누적이 아니라 항상 새로 시작하는 것이기에 ‘기획자’가 되기 위한 과정과 노력은 계속해서 틀을 깨뜨려 나가는 작업이 됩니다. 무척이나 피곤하고 불안정하게 느껴지지만 새로이 무언가를 한다는 설레임에 잠못드는 기획자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한량이 미래 유망직업 중 하나라고 저는 확신하기 때문에 ‘강태공’놀이에 로망을 갖고 있습니다.;;










